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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계화와 리쇼어링이 한국 경제에 주는 신호(공급망 재편과 한국 제조업의 위상 재정립 가능성)

by 단대디 이코노믹스 2025. 5. 12.

탈세계화와 리쇼어링이 한국 경제에 주는 신호

 

1990년대 이후 세계 경제는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급속도로 연결되어 왔다. 값싼 노동력, 효율적인 생산과 조달, 자유무역협정(FTA) 등이 글로벌 공급망을 촘촘히 엮어냈다. 하지만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과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세계화의 끝’ 또는 ‘슬로우벌라이제이션’이라는 신호가 본격화되고 있다. 오늘은 최근 몇 년간 세계 경제에 거세게 일고 있는 글로벌 공급망의 탈세계화와 리쇼어링의 현황과 한국 제조업에 주는 시사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탈세계화, 더 이상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제는 글로벌 대기업들조차 효율성보다 안정성과 자국 중심의 전략을 우선시하고 있다. 대표적인 현상이 바로 ‘리쇼어링’(Reshoring)이다. 이는 해외에 나가 있던 생산시설을 자국 혹은 인접국으로 다시 이전하는 움직임이다. 미국은 IRA(인플레이션 감축법), CHIPS Act 등을 통해 반도체와 배터리 산업을 본토로 끌어들이고 있으며, 유럽도 전략 산업에 대해 ‘탈중국’, ‘자국 생산’ 기조를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한 일시적 조정이 아니라,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변화로 봐야 한다. 국가 안보와 기술 주권이 경제정책의 중심에 들어섰고, 글로벌 기업들도 공급망을 '멀리서 싸게'보다 '가까이서 안전하게' 가져가려는 전략으로 선회하고 있다.

한국 경제는 이 거대한 흐름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그간 중국 중심의 공급망에 깊이 편입되어 있었던 한국 제조업은 이제 ‘어디서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 있다.

 

리쇼어링이 기회일까, 위기일까: 한국 제조업의 딜레마

리쇼어링은 표면적으로는 선진국 중심의 트렌드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글로벌 공급망의 판도 자체를 흔드는 요인이다. 이 흐름 속에서 한국 제조업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산업 경쟁력이 달라진다.

 

한국의 위치: 기로에 선 ‘중간자’

한국은 중국보다 기술이 앞서 있지만, 미국이나 일본보다는 인건비와 비용 측면에서 경쟁력이 있다. 이 애매한 위치가 기회가 될 수도, 위기가 될 수도 있다.

 

- 기회 요인: 미국과 유럽 기업들이 중국 대신 안정적인 생산거점을 찾을 때, 한국은 ‘믿을 수 있는 중간기지’로 떠오를 수 있다. 특히 배터리, 반도체, 소재·부품 등에서는 미국-한국의 ‘친미 공급망 축’이 강화될 수 있다.

 

- 위기 요인: 한국 기업들 입장에서는 중국 내 생산기지 철수가 쉽지 않다. 특히 현대차, LG, SK 등의 경우 이미 수십 년간 투자한 인프라와 네트워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의 보복 가능성, 자원 의존도 문제도 존재한다.

 

제조업 회귀? 국내 현실은 녹록지 않다

리쇼어링은 제조업의 부활을 의미하지만, 한국 내로의 생산 회귀가 실제로 가능하냐는 또 다른 문제다. 가장 큰 걸림돌은 ‘비용’이다.

 

- 인건비 상승: 한국은 아시아 주요 경쟁국(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대비 인건비가 높아 노동집약형 산업의 회귀는 현실성이 낮다.

- 규제 환경: 공장 설립과 운영에 있어 복잡한 인허가, 환경 규제 등이 기업들의 리쇼어링 의지를 저해한다.

- 인프라 불균형: 수도권 중심의 산업 인프라는 지역 확장을 어렵게 만들며, 지방의 숙련 노동력 부족도 문제다.

결국 한국이 제조업 리쇼어링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단순히 “돌아오라”는 구호가 아니라, 실질적인 유인책과 환경 정비가 병행되어야 한다.

 

공급망 재편 속 ‘전략적 재정렬’의 기회 만들기

글로벌 공급망이 재편되는 시기는 산업구조를 다시 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한국은 지금 ‘낀 나라’의 입장에서 벗어나, ‘전략적 중추 국가’로 재정립할 수 있다. 이를 위한 핵심 방향은 다음과 같다.

 

① 국내 생산 역량의 전략적 재배치

 

단순히 기업이 국내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산업을,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다시 배치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이 중요하다. 수도권 과밀 해소와 지방 산업 활성화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 지방거점 강화: 반도체는 용인, 배터리는 천안·울산, 바이오는 대전·오송 등 전략 산업별로 지역 특화 클러스터를 육성

- 스마트 인프라 확충: 전력, 물류, 데이터센터 등 첨단 제조에 필수적인 인프라를 동반 구축

- 중소·중견 제조업 육성: 대기업 의존을 넘어서 공급망의 다층화를 실현

 

② ‘친미 공급망’ 속 정교한 외교전략 필요

 

리쇼어링은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라 외교와 안보 전략과 직결된다. 미국은 동맹국 중심의 공급망을 원하지만, 한국은 중국과도 밀접한 경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양자택일이 아닌 다자 전략: 미국 중심 공급망에 참여하되, 중국과의 갈등은 최소화할 수 있는 ‘전략적 중립’이 필요하다.

기술 동맹 심화: 미국·일본·EU와의 반도체·AI·배터리 분야 기술 협력을 통해 한국의 기술 위상을 높이고 공급망 핵심국으로 자리매김

 

③ 인재와 기술에 대한 장기 투자

 

공급망 재편의 본질은 결국 기술력과 인재 싸움이다. 한국은 지금이야말로 ‘산업 교육’과 ‘기술 내재화’를 다시 시작해야 할 때다.

- 고급 기술인력 양성: 대학-기업-정부의 연계를 통해 AI, 반도체, 배터리 등 전략 분야 인재 확보

- R&D 세제 혜택 확대: 단기 성과 중심에서 벗어나 장기 연구에 대한 인센티브 강화

- 기술 독립 역량 강화: 소재·부품·장비 국산화와 같이 ‘리스크 분산형 기술 생태계’ 구축

 

 '공급망의 충격'을 '산업구조의 기회'로 바꾸려면

탈세계화와 리쇼어링은 한국 제조업에 위기일 수도 있지만, 의미 있는 구조 전환의 기회이기도 하다. 단순히 ‘돌아오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올 수 있는 환경과 논리를 제공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한국은 과거 제조업을 기반으로 고도 성장을 이뤄냈지만, 현재의 공급망 변화는 그 성공의 기반을 다시 짜야 한다는 신호다. 그 신호를 읽고 행동할 수 있는가가 미래 산업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다. ‘리쇼어링’은 단지 공장의 이동이 아니라, 산업 전략의 리셋이다. 한국은 이제, 그 리셋 버튼을 누를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의 국면에 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