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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업정책은 여전히 유효한가? - 반도체 중심 전략의 리스크와 탈중앙집중 산업 정책의 필요성

by 단대디 이코노믹스 2025. 5. 12.

반도체 중심 전략의 리스크와 탈중앙집중 산업 정책의 필요성

반도체에 '올인'한 산업정책, 과연 전략인가?

한국의 산업정책은 오랜 기간 ‘선택과 집중’ 전략을 추구해왔다. 특히 지난 20년간은 반도체 산업에 대한 정책적 의존도가 절대적이었다. 국가 주도의 R&D, 세제 혜택, 인프라 구축 등이 결합되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압도적인 점유율을 확보했다.

 

하지만 그 성공의 그림자는 점점 짙어지고 있다. 최근 들어 메모리 가격의 급변동, 글로벌 공급망 재편, 지정학적 리스크가 반도체 산업에 직격탄을 날리면서 한국 경제의 과도한 편중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실제로 2022년~2023년 사이 한국 전체 수출 감소분의 70% 이상이 반도체 부문에서 발생했다. GDP, 고용, 투자, 무역수지 등 핵심 경제지표가 반도체 단일 품목에 지나치게 연동돼 있는 구조는 산업 다양성과 회복탄력성을 저해하고 있다.

 

반면 미국, 일본, 대만은 첨단 산업에 대한 정책적 지원을 하되, 특정 품목에의 과도한 집중은 회피하려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오늘은 미국, 일본, 대만의 사례를 살펴보고, 이제는 한국 산업정책도 ‘성장 부문 올인’에서 벗어나, 산업 포트폴리오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할 필요성과 방향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대만의 산업정책은 왜 다르게 진화했는가?

1) 일본: 기술 생태계 전반에 대한 장기 투자

일본은 1990년대 ‘잃어버린 10년’을 거치며 산업정책을 전면 수정했다. 단순히 특정 산업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R&D, 소재·부품·장비 생태계, 제조 인프라 전체를 장기적으로 육성하는 방향으로 전환한 것이다.

 

예컨대 일본은 반도체에서는 TSMC나 삼성처럼 '파운드리 대기업'은 없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소재·장비 기업(도쿄일렉트론, 신에츠, 스미토모 등)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이는 '밸류체인 다변화'와 '위기 분산'이라는 정책적 설계의 결과이다.

 

또한 일본은 수도권 집중을 피하고, 규슈·도호쿠·홋카이도 등 지역별 전략 산업을 지정해 지방 정부와 협력하는 분산형 정책을 취해왔다. 이는 인구 감소 시대에 접어든 일본이 지역경제 자립성과 고용 안정성을 동시에 추구한 결과로, 한국의 서울·경기 중심 모델과 대비된다.

2) 대만: TSMC 중심의 개방형 혁신 생태계

대만의 사례도 주목할 만하다. TSMC는 단일 기업이지만, 대만 정부는 이를 국가 전략자산으로 규정하고 법·세제·인력 등 전방위로 지원했다. 중요한 점은, TSMC는 '기술 폐쇄형'이 아닌 글로벌 협업형 생태계 전략을 택했다는 것이다.

 

TSMC는 애플, AMD, 인텔, 엔비디아 등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확보했고, 자체 설계 역량이 아닌 외부 기술 수요를 흡수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이는 삼성의 ‘수직통합 모델’과 다른 접근이며, 산업 생태계 다양성과 개방성이라는 측면에서 정책적으로 큰 차이를 보인다.

 

또한 대만은 학계, 연구소, 민간기업 간의 유기적 협력 구조를 정책적으로 촉진해왔다. 그 결과, 인력의 순환과 기술 축적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유연한 산업구조가 형성되었고, 이는 외부 충격에 대한 회복탄력성도 높이는 결과로 이어졌다.

3) 탈중앙집중과 산업 다각화 없이는 미래도 없다

한국 산업정책의 한계는 편중과 중앙집중으로 요약된다. 반도체, 조선, 자동차 등 일부 대기업 중심의 수출산업에 지나치게 자원을 몰아주었고, 대부분 수도권에 산업 거점이 몰려 있다.

이 구조는 단기 성과에는 유리했지만, 다음과 같은 리스크를 가져왔다:

  • 산업 리스크 집중: 반도체가 흔들리면 국가경제 전체가 흔들리는 구조
  • 수도권 포화: 인프라, 인력, 주거비 등의 문제로 신규 투자 유인이 감소
  • 지역소멸 가속화: 산업 기반이 없는 지방은 고령화와 인구 유출로 악순환
  • 이제 한국의 산업정책은 지방 분산형 산업 모델과 미래산업 다각화 전략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정책 방향은 다음과 같다:

  • 탈서울 전략 거점 육성: 반도체, AI, 배터리, 바이오 등의 신성장 산업을 비수도권에 유치하고, 관련 대학·연구소·창업지원 인프라 연계
  • 중소·중견기업 중심의 기술정책 확대: 대기업 의존에서 벗어나, 자체 기술력 있는 기업의 성장 지원
  • 밸류체인 전체의 육성: 소재·부품·장비, R&D, 유통, 인력 양성 등 산업 전단계에 대한 종합 지원
  • 개방형 혁신 생태계 조성: 대학, 민간기업, 연구기관 간의 협업이 촉진되는 제도 설계

산업정책은 단순한 ‘산업 키우기’가 아니다. 어떤 산업을, 누구와,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육성할 것인가라는 구조 설계다. 한국은 여전히 기술력과 인프라, 인재에서 강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어디에, 어떻게 배분할지에 따라 미래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성장하는 산업'이 아닌, '지속가능한 산업구조'가 필요하다

이제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어떤 산업이 잘 나가느냐”가 아니라, “어떤 구조가 위기 속에서도 살아남느냐”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반도체는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 하나에 의존하는 산업정책은 리스크를 축적하는 방식이다. 일본처럼 밸류체인을 고도화하거나, 대만처럼 개방형 생태계를 조성하는 방향으로 산업의 구조 전환이 절실하다.

  • ‘성장 중심’에서 ‘회복력 중심’으로,
  • ‘중앙 집중’에서 ‘균형 발전’으로,
  • ‘대기업 중심’에서 ‘생태계 중심’으로

향후 한국의 산업정책이 이 방향으로 전환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기술력과 경제력도 머지않아 위협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