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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의 기술 격차 축소가 한국 제조업에 끼치는 구조적 위기

by 단대디 이코노믹스 2025. 5. 11.

중국과의 기술 격차 축소가 한국 제조업에 끼치는 구조적 위기

 

한때 '빨리빨리 문화' 로 상징되던 한국 제조업의 경쟁력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중국은 이제 '더 빠르면서도 더 싸고, 점점 더 정교한' 제조강국으로 변모하고 있다.이번에는 디스플레이, 배터리, 철강 산업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중국의 추격과 한국의 대응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기술 초격차의 붕괴: 더 이상 '따라올 수 없는' 거리는 없다

 

한때 한국 제조업의 경쟁력은 ‘기술 초격차’에 기반하고 있었다. "따라오려면 5년은 걸릴 것"이라던 기술 격차는, 이제 1~2년 이내로 좁혀졌거나 이미 따라잡힌 분야도 많다.

 

대표적인 사례가 디스플레이 산업이다. 2000년대 중반만 해도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는 전 세계 LCD·OLED 시장을 양분하며 압도적인 기술 우위를 자랑했다. 그러나 중국의 BOE, TCL 등은 국가 주도의 막대한 보조금과 자본 투자로 빠르게 기술을 확보했고, 지금은 대형 OLED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과 물량 공급 능력으로 한국을 넘어섰다.

 

배터리 산업도 마찬가지다.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이 선도하고 있지만, CATL과 BYD는 이미 글로벌 점유율에서 한국을 능가하거나 따라잡았다. 특히 LFP 배터리 같은 저가·중형 기술에서의 혁신은 한국 업체들의 '고성능 중심 전략'에 구조적 부담을 주고 있다.

 

철강 산업 역시 과거에는 한국이 품질과 생산성에서 앞섰지만, 중국의 생산능력 확대와 기술 자립이 급속히 진전되면서 수출단가가 하락하고 있다. 특히 탄소중립 기술에 대한 R&D 격차는 빠르게 줄고 있으며, 일부 분야에서는 중국의 제품이 품질과 가격 양면에서 경쟁력을 가지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기술 장벽’이 시장 방어막 역할을 했다면, 지금은 그 장벽이 무너지고 있다. 한국 제조업은 단순한 가격·규모 경쟁이 아닌, 구조적 기술 리더십의 재정립이라는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중국의 추격 방식은 어떻게 다른가?

 

중국이 단기간 내 기술 격차를 줄일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한 '카피 전략'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국가 주도의 집중 투자 + 독립 생태계 구축이라는 이중 전략을 취했다.

 

우선, 정부 주도 보조금과 전략산업 육성 정책이 결정적이었다. 예를 들어 배터리 산업의 경우, 중국 정부는 CATL에만 수조 원의 정책 금융을 지원했고, 전기차 구매자에게도 자국 배터리 사용 조건을 붙인 보조금 제도를 운영했다. 이는 내수 보호와 동시에 기술 축적의 시간을 벌어준 셈이다.

 

둘째, 공급망의 독립성을 빠르게 확보했다. 중국은 철강, 배터리, 디스플레이 등 거의 모든 제조 분야에서 소재-부품-장비(SiP-SiM-SiE) 전 과정을 국산화하는 데 집중해왔다. 이는 외부 충격(예: 미국 수출 통제)에 대한 내성을 키우는 전략이기도 하다.

 

셋째, 인건비와 투자비의 절대적 차이도 한국 기업에는 위협이다. 한국은 고임금, 고세율, 고비용 구조로 인해 공장 설립과 대량 생산에 불리한 환경이다. 반면 중국은 지방정부의 무상 토지 제공, 세제 혜택, 인건비 절감 등을 통해 빠르고 유연한 생산 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

 

결국 중국은 단순한 '저가 카피'에서 '전략적 혁신'으로 진화하고 있으며, 시장 장악 이후 가격과 기술로 압박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이는 한국 기업에 더 큰 구조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한국 제조업의 대응 전략: 전환, 고도화, 그리고 생존

 

이 같은 중국의 추격에 대해 한국 제조업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단기적인 생산성 향상이나 가격 조정만으로는 구조적 위기를 돌파할 수 없다. 핵심은 세 가지다: 기술의 전환, 산업의 고도화, 공급망의 리디자인이다.

 

첫째, 기술 전환이 필수다. 더 이상 기존 기술을 개선하는 방식으로는 격차를 유지할 수 없다. 배터리 산업에서 전고체 배터리,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마이크로LED, 철강 산업에서 수소환원제철 같은 미래형 기술에 선제적 투자가 필요하다. 단기 수익을 희생하더라도, 중장기 생존을 위한 기술 ‘베팅’이 절실하다.

 

둘째, 고도화된 시장 공략이 필요하다. 중국은 중저가 시장에 강하지만, 프리미엄 B2B 시장에서는 여전히 한국 브랜드가 경쟁력을 갖고 있다. 삼성·LG의 기술적 신뢰, 현대차의 브랜드 이미지, 포스코의 친환경 제품력 등은 고부가가치 영역에 집중할 때 더욱 빛을 발한다.

 

셋째, 공급망과 생산기지의 전략적 재편이 요구된다. 중국의 지정학 리스크가 커지는 상황에서 동남아, 인도, 미국 등 제3의 생산기지를 확대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은 이미 북미 공장 확대를 통해 이러한 대응에 나서고 있다.

 

또한 한국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기술개발 지원뿐 아니라 규제 완화, 노동시장 유연화, 세제 지원 등을 통해 기업이 신속하게 전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한때 ‘빨리빨리 문화’로 상징되던 한국 제조업의 경쟁력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중국은 이제 ‘더 빠르면서도 더 싸고, 점점 더 정교한’ 제조강국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들에게 따라잡히는 속도가 더 빨라지는 지금, 한국 제조업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속도보다 방향, 규모보다 깊이, 과거의 성공보다 미래의 준비다. 한국은 여전히 강력한 기술력과 글로벌 브랜드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켜야 할 것이지, 자동적으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왜 앞서 있었고, 앞으로 어떻게 앞서야 하는가”를 다시 정의해야 할 시간이다.